안녕하세요. 저는 35년 전, 그러니까 1983년에 경희의료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은 김선경입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제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자 함입니다. 예전부터 감사의 글을 쓰고 싶었지만, 바쁜 생활로 인해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이제야 펜을 듭니다.
병이 발생하다
중학교 1학년 어버이날 학교를 가는 도중에 갑자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두통이라 생각하고 대수롭게 않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통이 심해져 학교에서 조퇴를 하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청주병원에 진찰을 받으러 갔습니다. 진찰 간 의사로부터 ‘특별한 이상이 없고 신경성이니 약을 복용하면 괜찮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약제실에서 약 처방을 기다리는 동안 메스꺼움을 느끼며 갑자기 구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약을 받은 후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는 체한 것 같다며 소화제를 주셨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데리고 여러 병원에 방문하여 진찰을 받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과 함께 특별한 병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며칠 후, 청주병원 소아과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여러 검사를 해봤지만, 기존과 똑같았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었죠. 그러던 중 CT 촬영을 통해 ‘뇌종양’을 진단받게 되었습니다. 해당 의사는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고, 그렇게 경희의료원과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수술을 하다
저는 경희의료원 신경외과 중환자실에 바로 입원을 했고 5월 31일에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렸기 때문에 수술만 하면 바로 완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수술 경과는 좋지 않았고, 6월 2일에 다시 수술을 진행하였습니다. 머리에서 맹장까지 관을 심는 수술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수술 후 아침, 점심, 저녁마다 6번의 주사를 맞으며(혈관주사 2번, 엉덩이 주사 4번) 투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혈관은 터지고 엉덩이는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걷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다
수술이 끝나고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링거를 꽂고 휠체어를 타고 간 방사선실에는 머리가 하얀 안치열 원장님과 원석록 과장님이 계셨습니다. 치료를 시작하고 3~4일이 지나자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머리가 되었고 점점 기운도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치료는 머리 뿐 아니라 척추, 꼬리뼈까지 광범위하게 진행됐습니다. 퇴원 후에는 병원 근처에 방을 얻어 통원치료를 했습니다. 8주간 치료를 하는데 점점 지치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밥을 안 먹겠다고 어머니와 참 많이 다투었습니다. 주말이면 집에 내려갔는데 그날은 새벽부터 배가 아팠습니다. 어머니께서 사다주신 소화제를 먹고 갔지만 청주에 도착하니 배가 더 아팠습니다. 청주에 있는 병원에 갔더니 맹장인지 감염인지 확실치 않다고 답변을 받아 다시 서울에 와서 검사를 받고 수술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맹장염이었습니다. 맹장염 치료가 끝나고도 방사선 치료는 계속 되었습니다. 치료를 받고 나오면 원장님은 치료를 잘 받았다고 제게 사탕, 캐러멜을 2~3개씩 주셨습니다. 그때 저 같은 어린 환자가 없었기에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습니다.
병이 재발하다
집에 와서 약을 먹으며 지내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서울로 올라와 다시 검사를 받고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머리로 다시 깎은 후 머리에 심었던 관을 다시 빼냈습니다. 수술한지 4개월 만에 암이 재발한 것입니다. 치료는 더 강해졌고 저는 더욱 야위어갔습니다.
학교에 복학하다
다음해에 그 짧은 머리로 저는 중학교 1학년에 다시 복학하였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지쳐 쓰러져 자는 일이 많았습니다. 기운도 나지 않고 빠진 머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방사선 후유증이었습니다. 6개월마다 CT 검사를 하였고 매일 약을 꼭 챙겨 등교하였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아침 7시에 나가 밤 12시에 들어오며 입시 공부를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CT 검사를 하였는데 완치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약도 끊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저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후 3학년까지 잘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결혼을 하다
대학에서 전산학을 공부한 저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모님께서는 제가 아이를 못 낳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척추치료를 받을 때 난모세포도 다 죽어서 불임이 되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이를 못 낳을 거라 생각 했었는데 말이죠. 다행히 두 아이는 잘 자랐고 둘 다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지천명을 바라보며
지금까지의 삶이 평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가끔 머리가 아프면 다시 재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고, 또 기운이 없어 무얼 하고자 해도 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면 ‘어머니 어디 아프세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사는 게 정말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받은 머리는 지금도 대머리입니다. 그래서 미용실 가는 것도 싫어합니다. 올해 큰 아들은 대학교 3학년이고, 작은 아들은 대학교 1학년입니다. 그동안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나니 제게 글을 쓸 여유가 생겨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방사선 치료를 받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원장님, 그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살아보니 건강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