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웃음에 희망과 용기를 담을 수 있도록 필리핀 태풍 피해지역을 가다

동행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지 보름째가 되던 11월 22일, 경희의료원 해외봉사단 12명은 한국의 평화로움을 뒤로 하고 고통과 어둠의 땅이 된 필리핀 반타얀 섬으로 향했다. 무더위와 높은 습도 속에서도 쉬는 시간 없이 강행군을 펼쳐 닷새 동안 주민 2,154명을 진료하고 돌아왔다. 반타얀 섬 주민들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를 피우고 온 봉사단의 이야기를 동행 취재한 김관진 기자를 통해 들어본다.

“이 약 먹고 아프지 마요.” 작고 가냘픈 아이는 어쩌면 난생 처음 받아봤을 약봉지를 한 손 가득 꼭 쥐었다. 덜 마른 진흙을 쓴 맨발, 땀에 젖은 구멍 난 옷가지. 피로함에 어두웠던 아이의 얼굴은 한국에서 온 낯선 얼굴의 의사로부터 전해진 알록달록 알약봉투에 이내 웃음을 머금었다. 아이에게 전해진 건 그저 약이 아니었다. 아이는 ‘희망’을 함께 건네받았다.

 

반타얀 섬에 내린 도움의 손길
태풍이 할퀴고 간 필리핀의 ‘작은 보라카이’ 반타얀 섬. 태풍으로 주민 24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4,000명 넘게 사망한 타클로반 지역에 가려 제대로 된 의료지원을 받지 못했다. 경희의료원 국제진료센터 해외봉사단이 이 고통의 땅에 최초로 의료지원을 위해 손을 내밀었다. 의사 6명, 간호사 3명, 의료지원인력 3명 등 12명으로 구성된 해외봉사단은 5박 6일간 아픈 주민들을 돌보며 희망을 심었다.

봉사단이 처음 마주한 섬은 처참했다. 폭격이 가해진 듯 몸을 기댈 벽도 없이 처참히 짓밟힌 판잣집과 허리가 꺾인 전신주와 나무.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눈처럼 흰 백사장의 포장을 벗겨 낸 반타얀 섬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바로 반타얀 시립병원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해외봉사 경력만 100회 이상인 조중생 단장(이비인후과 교수)의 지휘 아래 봉사단은 병원진료팀과 순회진료팀으로 나눠 주민들을 살폈다. 순회진료팀은 병원을 찾을 수 없는 섬 외곽의 주민들을 위해 텐트 두 동과 약 상자를 짊어지고 바랑가이(면 규모의 마을)를 순회하며 임시진료소를 운영했다.

봉사 이틀째인 24일까지 하루 300여 명이었던 환자 수는 봉사단의 방문 사실이 입소문을 타면서 하루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봉사단은 하루 평균 12시간 동안 점심시간도 따로 내지 못한 채 강행군을 펼쳤다. 낮 최고기온 37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에서 탈진하는 단원도 생겨났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일몰 후에는 랜턴을 켜고 환자들을 맞았다.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두운 상황이었지만 대기 장소를 여전히 가득 메우는 환자들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진심을 전하고 희망과 용기를 보다
필자는 실제 의료봉사 모습을 보기 전에는 대부분 해외의료봉사가 생색내기 위한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보다는 의무감으로 임하는 활동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5박 6일간 경희의료원 봉사단 의료지원을 함께하면서 여실히 깨졌다. 환자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손짓 발짓하며 대화하던 모습, 점심 삼아 준비했던 치즈 한 장 낀 식빵을 망설임 없이 꼬마 환자에게 건네던 모습. 특히 이경석 소아청소년과 전임의가 아기 환자를 품에 안고 생글생글 웃던 모습은 봉사단의 ‘진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는 보았다. 봉사단을 마주한 반타얀 섬 주민들의 얼굴에 희망을 담은 웃음이 피는 것을. 그들이 건네고 온 것이 단지 약이 아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을. 이들의 의료지원이 국내 다른 의료진들에게 릴레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반타얀 섬에서 만난 환자의 한마디로 짧은 글을 마친다. “당신들을 만났을 때 처음으로 우리가 혼자가 아니란 것을 느꼈습니다. 고마워요 정말.”